======== 언양읍사무소 제공========== 언양읍성 언양읍성(彦陽邑城)은 동부리와 서부리 일원에 걸쳐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중심부분은 동부1리이다. 1966년 12월 17일 사적 제153호로 지정된 이 읍성은 처음에는 토성(土城)이었는데 세종 때의 토성은 둘레가 불과 157보(步 : 1,498자)에 지나지 않았고, 그 안에 2개의 우물이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邑土城周回一百五十七步,內有井二"). 문종 원년(1451)에는 현북(縣北)의 산성으로 옮기려 했으나, 축성(築城)이 어려울 뿐 아니라 산성을 쌓는다 하여도 백성들의 생활에 마땅치 않으므로 그대로 성을 더 확장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 6년(1500)에 이르러 현감 이담룡(李聃龍 : 본관 潭陽, 밀양출신)이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동시에 그 규모도 둘레 3,064자, 높이 13자 성가퀴(城堞 : 성벽 위에 쌓은 작고 낮은 담장) 834, 우물 4개로 확장하여 성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이다. 성의 특징은 평지에 쌓은 전형적인 읍성의 하나로 동서와 남북이 각 260m의 정방형(正方形)인데, 각 변에 성문을 두고 성문에는 옹성(擁城)을 배치하였다. 또 이 성은 거대한 바위를 면(面)만 거칠게 다듬은 기석(基石)위에 큰 돌을 얹어 큰 돌 사이에는 많은 잔돌을 넣어 쌓은 견고(堅固)한 성으로 성기(城基)의 돌출한 부분은 문터(門址)나 포루(砲樓)에 해당하는 곳이다. 성문에는 북문을 제외한 성문에는 누각이 있었다. 즉 동문을 망월루(望月樓), 서문을 애일루(愛日樓), 남문을 영화루(暎花樓), 또는 진남루(鎭南樓), 북문은 누각이 없어 계건문(啓乾門)이라 하였다. 읍성은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허물어진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개수(改修)한 것이 최근까지 이르고 있다. 옛날 성 안에는 현청(縣廳)·객사(客舍)·평근당(平近堂)·내동헌(內東軒) 관아를 비롯하여 호적고(戶籍庫)·통인방(通引房)·급창소(及唱所)·음향각(音香閣)·취향정(翠香亭)·삼군(三門)·현사(縣司)·작청(作廳)·필야당(必也堂)·추소(秋所)·수세소(收稅所)·나장방(邏將房)·관노방(官奴房)·공방소(工房所)·호적소(戶籍所)·군관청(軍官廳)·군기소(軍器所)·포청(砲廳)·병청(兵廳)·예방소(禮房所)·서역소(書役所)·영어(囹圄 : 감옥) 등의 부속관아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입성하여 4대문은 파괴 소각되었고, 호(壕)는 그후 석성 내면의 보성(補城)이던 토성을 헐어 매축하여 논으로 바뀌었다. 홍수 때 남천의 제방이 자주 유실되어 해마다 풍수기(豊水期)만 되면 주민들이 근심이 되었는데, 일제시대인 1923년 9월에 기공하여 1927년 3월에 완공된 언양남천호안공사(彦陽南川護岸工事)로 성의 남반부를 헐어 그 돌을 뜯어 썼기 때문에 지금은 원형을 잃었으며 1996년 10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울산시가 언양읍성의 동문과 북문 사이를 걸쳐 총 139.5m를 개축하였다. 성안에는 옛 동헌(東軒)자리에 언양지역 현대식 교육기관의 효시(嚆矢)인 언양초등학교가 있어 약 1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