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의 진산(鎭山) "고헌뫼" 백두 대간의 준봉들이 서로 휘감으며 연결되다가 태백 에서 낙동정맥 으로 돌아서서 경상남북도,울산에 와서 영남알프스를 이루는데 북으로부터 최초로 형성되는 관문의 길목에 있는산이 고헌산(高獻山.1032m)이다. 북으로 소호령을 넘어 백운산으로부터 그맥을 대고 서쪽으로 운문령을 사이에두고 가지산과 손을 맞잡으며 두리뭉실하게 솟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헌산은 현(縣,언양현) 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高獻山在縣北十里鎭山 예로부터 도성이나 고을을 진압하는 주산을 진산이라 했는데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들에 있어서 하늘과 가까운 산은 태양신에 접근하기 쉬운곳으로 생각 했는데 한때 헌산현(獻山縣) 이라 불렀던 언양의 고헌산과 관계를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현조에는 다음과같이 적고 있다.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으로 경덕왕 때 헌양현으로 고쳐 양주(지금의 양산) 의 속현으로 했고 고려 현종때 울주에 예속 시켰다. 인종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지금이름으로 개칭하였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그대로 하고 현감을 두었다. 本新羅居知火縣景德王改獻陽爲良州領縣 高麗縣宗屬蔚州 仁宗置監務後改令名本朝因之爲縣監 이기록으로 미뤄보아 헌의 고음(古音)은 "언" 이었으며 언(獻)이 변화해 언(彦)이 됐다는 애기다. 고헌산의 옛말은 "고언산" "고언뫼"였던 것이며 또 고헌산은 높은 봉우리란 뜻을 가지고 있어며 주변사람들은 고헌산을 진산, 숭산,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고헌산 산정에는 용샘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고헌산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진산 숭산 등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어져 온 듯 싶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고헌산 산신령께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영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양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고헌산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경주 산내면 사람들은 고헌산을 "고함산"이라하는데 그연유를 알아보자.
경주군 산내면 중말이란 마을 뒤에 문복산이 있는데 이산 중간에 "디린바위" 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바위에는 석이 버섯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날 한 젊은이가 이 바위에 자라는 석이를 따기위해 줄을 메달고 석이 따기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이 디린바위에는 키같은 지네와 솥뚜껑만한 거미가 살고 있었는데 마침 석이를 따는 것을 본 거미는 젊은이가 매달려 있는 줄을 물어뜯어 끊을려고 했다. 그러나 석이따기에 열중한 젊은이는 전혀 이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때 동쪽 고헌산에서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다 쉬던 나뭇꾼이 이사실을 보고 거미의 장남으로 젊은이가 죽을 위기에 처한걸보고 나뭇꾼은 "여보시요, 여보시오 석이따는 젊은이. 보시오, 석이따는 젊은이. 거위를 조심하시요." 하고 몇 번 고함을 질러댔다. 젊은이는 이소리를 듣고 위를 쳐다보니 과연 거미한 마리가 줄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러자 얼른 몸을 피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산을 고함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헌산 정상에는 산성골이라는 옛 산성터가 있어 옛날 부족집단의 흔적이 아닌가하고 여겨진다. 고헌산은 두리뭉실한 산세에 비해 골짜기가 많다. 대통골, 곰지골, 연구골, 홈도골, 도장골, 큰골,등 수많은 계곡이 있는데 곰지골은 곰이 자주 나타났다하여 붙혀졌고, 연구골은 영고사라는 큰절이 있는곳인데 조선조 말에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홈도골(두서면 차리=나의고향)은 아름다운 폭포를 숨기고 있고 , 도장골은 골짜기가 길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다. 농경민족인 우리 조상들은 가뭄이 계속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비가 내리고 안내리는 것이 오로지 산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믿는 우주관에서 였다. 고헌산 산정에는 용샘(龍泉)이라는 우물이 있어 이 높은 곳에서 부정을 피하고 하늘과 산신과 비를 다스리는 용신에게 정성껏 비를 빌었다. 솥발산의 산정에는 용바위가 있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반하여 고헌산의 경우는 용샘에서 지냈다. 이런 것을 볼 때 어쩌면 고헌산의 산신이 용신인 것 같이도 생각된다. 고헌산의 정상에는 옛 산성(山城)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고헌산 정상주변과 다개리 산성골(山城谷)에는 옛 산성터가 있고 다개리와 차리의 경계에는 고분군이 있어 예날 부족집단의 흔적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는 성읍(城邑)국가시대의 구라벌(仇良伐)나라의 도성이 아니었나 하는 견해가 있다. 구라벌은 원래 성읍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촌락사회 때는 '사로육촌(斯盧六村)'의 하나 였다.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에 속했던 땅이 아닌가 한다. 그후 사로국이 서게 된 뒤에는 돌산고허촌의 후신인 사량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본다. 한편 언양면 다개리와 두서면 차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다개고개(茶開) 주변에는 석곽묘의 고분군이 있다. 이들 고분군의 존재는 이 근처에 사람들의 집단적인 정착생활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하겠다. 이들 증거로 미루어 볼 때 고헌산을 중심으로 한 성읍사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지배층은 고헌산에 산성을 쌓아 외적을 막고 살면서 그 읍락의 이름을 구라벌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고헌산을 가르켜 월성군 산내면 사람들은 [고함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고함산에 따른 한가지 민담이 전해온다. 산내면 대현리 중말에 있는 문복산의 디린 바위에서 줄을 매어달고 바위에 붙은 석이(石耳)버섯을 어떤 사람이 열중하여 따고 있었다. 이 디린 바위에는 채이짝 같은 지내와 서말지 소댕만한 거미가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 거미가 사람이 석이를 따는 것을 보고 그만 줄을 물어 뜯어 끊고 있었다. 그러나 버섯을 따고 있던 사람은 이런 위함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것도 모르고 버섯 따기에만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때 동쪽 건너편에 우뚝 솟은 고함산에서 어느 한 사람이 가만히 디린 바위쪽을 보니 거미의 장난으로 한 사람의 생명이 곧 죽게 될 찰라에 있었다. 그래서 그사람은 크게 [여보시요, 여보시오 석이(石耳)따는 분! 여보시요, 석이 따는분, 거미를 조심 하시오]하며 몇 번 고함을 지르니 그 사람이 이것을 듣고 머리 위를 쳐다보니 과연 한 마리의 큰 거미가 놀랍게도 줄을 뜯고 있었다. 이를 본 사람은 재빨리 몸을 피하여 위기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부터 산내사람들은 고헌산을 [고함산]이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