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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천전리 각석 (川前里 刻石)

 [ 천전리 각석 (川前里 刻石) 정보]

종 류 : 국보

지정번호 : 제147호

지정일자 : 1973. 5. 4

소 재 지 :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07-8
천전리 각화는 1970년에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조사대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이 각화는 세가지의 다른 그림이나 글들이 새겨져 있다. 기하학문적도안과 화랑들의 국토순례장을 말하는 3백여 자의 명문(銘文)이 그것이다. 첫째, 기하학문적도안(幾何學文的圖案) 쪽을 보면 동심원(同心圓).삼각형.능형(菱形) 등의 도안무늬와 동물의 그림이 곁들여져 있다. 이 석각의 우중부에는 동심원. 와문(渦文) 능형 등 기하학문으로 새겨졌고, 그 수법을 보면 쪼은 것이 아니라 갈아서 패어지게 한 그림들이다. 또 그림 중에는 가는 선각(線刻 )의 배 그림도 있고 문양 및 사슴 등의 동물화가 탁각(啄 刻) 된 것도 있어 반구대(盤龜臺)의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석각의 좌부에는 문양틈에 끼어 눈.코.입을 그린 사람 머리 같은 것이 있고, 그 위 일대에 희미한 그림들이 있어 이 각화가 오랜 시기를 두고 반복하여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 그림에는 청동기시대 후기 이전의 것도 들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중좌부에는 희미한 문양바탕 위에 뚜렷하게 동심원, 능형 등이 있는데 능문의 윤곽은 2내지 3선(線)이고 이것들이 몇 개씩 연결되어 있다. 또 석각의 좌부를 다시 보면 상하로 연결된 두 개의 능형문이 5개가 가로로 병렬(竝列)하여 있는데 능형의 내부에 선을 그어 여자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이 석각에 나타나는 동심원은 구라파의 암각화나 일본의 승문식 (繩文式)토기에서 볼 수 있는 나선문(螺旋文)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상징한 듯 하다는 것이다. 이밖에 다른 도안 무늬들도 동심원과 비슷하게 어떤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러한 각도에서 보아 이 각석을 제천단(祭天壇)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각화의 조성연대는 반구대의 암각화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후기내지 원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둘째, 화랑들의 국토순례장으로 보는 견해이다. 화랑도들은 통상 3년동안을 서약.수련.의무이행 기간으로 정하여 국토 순례, 성산관참(聖山觀參), 영악수험(靈岳修驗) 등을 통하여 도의를 연마하고 가악을 즐기며 산수를 유오(遊娛)하였다. 이러한 수련기간에는 산수가 좋은 두동면 천전리에도 찾아와서 4선(仙)들이 그 이름을 새겨놓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好世」진평왕때 화랑 「水品」선덕여왕때 화랑 「戊年六月二日 永郞成業」통일신라 직후의 화랑 이러한 글을 본다면 이곳이 화랑들의 국토순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3백여 자의 명문에 관한 것이다. 각석의 중하부에는 3백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명은 법흥왕 12년(525)에 입종갈문왕 (立宗葛文王)이 가신을 거느리고 서석골(書石谷)에 나들이 한 것을, 또 추명은 그의 아들 법흥왕(法興王)이 동왕 26년(539)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놀았던 것을 기념삼아 새겨 둔 것이다.  

찾아가는 길
국도 35번, 언양에서 경주로 가다보면(6Km정도), 천전교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따라가면(위로는 고속도로가 지나감), 천전마을이 나온다.
길을 따라 계속가면 대곡댐 가기전, 효정원 건물이 보이는데, 효정원 담장을 돌아 계속가면, 대곡천을 만난다, 川을 건너 20m정도 오르면 천전리 각석의 이정표를 만난다.

천전리 각화는 1970년에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조사대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이 각화는 세가지의 다른 그림이나 글들이 새겨져 있다. 기하학문적도안과 화랑들의 국토순례장을 말하는 3백여 자의 명문이 그것이다.

첫째, 기하학문적도안 쪽을 보면 동심원,삼각형,능형 등의 도안무늬와 동물의 그림이 곁들여져 있다. 
이 석각의 우중부에는 동심원, 와문, 능형 등 기하학문으로 새겨졌고, 그 수법을 보면 쪼은 것이 아니라 갈아서 패어지게 한 그림들이다. 
또 그림 중에는 가는 선각의 배 그림도 있고 문양 및 사슴 등의 동물화가 탁각된 것도 있어 반구대의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석각의 좌부에는 문양틈에 끼어 눈,코,입을 그린 사람 머리 같은 것이 있고, 그 위 일대에 희미한 그림들이 있어 이 각화가 오랜 시기를 두고 반복하여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 그림에는 청동기시대 후기 이전의 것도 들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중좌부에는 희미한 문양바탕 위에 뚜렷하게 동심원, 능형 등이 있는데 능문의 윤곽은 2내지 3선이고 이것들이 몇 개씩 연결되어 있다. 또 석각의 좌부를 다시 보면 상하로 연결된 두 개의 능형문이 5개가 가로로 병렬하여 있는데 능형의 내부에 선을 그어 여자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이 석각에 나타나는 동심원은 구라파의 암각화나 일본의 승문식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나선문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상징한 듯 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 다른 도안 무늬들도 동심원과 비슷하게 어떤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러한 각도에서 보아 이 각석을 제천단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각화의 조성연대는 반구대의 암각화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후기내지 원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둘째, 화랑들의 국토순례장으로 보는 견해이다. 화랑도들은 통상 3년동안을 서약·수련·의무이행 기간으로 정하여 국토 순례, 성산관참, 영악수험 등을 통하여 도데 다음과 같다. 

「好世」진평왕때 화랑 
「水品」선덕여왕때 화랑
「戊年六月二日 永郞成業」통일신라 직후의 화랑 
이러한 글을 본다면 이곳이 화랑들의 국토순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3백여 자의 명문에 관한 것이다. 각석의 중하부에는 3백여 자의 명문에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원명과 추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명은 법흥왕 12년(525)에 입종갈문왕이 가신을 거느리고 서석골에 나들이 한 것을, 또 추명은 그의 아들 법흥왕이 동왕 26년(539)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놀의를 연마하고 가악을 즐기며 산수를 유오하였다. 이러한 수련기간에는 산수가 좋은 두동면 천전리에도 찾아와서 4선들이 그 이름을 새겨놓고 있는았던 것을 기념삼아 새겨 둔 것이다 

   카앤투어 제공 천전리각석 동영상보기 :     


선사·신라인이 함께 쓴 미학교과서

그림은 제작 당시의 정신문화와 사회구조, 생활양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물증이 된다. 수천년의 시공을 뚫고 비교적 온존하게 간직한 바위 그림이라면 더욱 역사적 가치는 크다. 

울산에 이런 의미를 갖는 바위그림이 두 군데 있다. 둘다 국보다. 그중 하나가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07-8 천전리각석(국보 제147호)이다. 또 하나의 바위그림인 반구대암각화가와 더불어 울산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천전리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 사회 사상 경제 문화 미술 등 전 역사를 생동감있게 보여준다. 면각동물상은 신석기말기, 각종 문양은 청동기시대, 300여개의 명문은 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전리각석은 지난 1970년 동국대 문명대교수를 중심으로 한 불적조사단에 의해 발견됐다. 이후 국내 암각화 연구의 신기원을 이뤘다.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본격조사된 뒤 1973년 5월 국보로 지정됐다. 

대곡천 상류에 위치한 이 바위는 가로 9.7m, 세로 2.7m의 직사각형에 적색 점토암이다. 바위면의 윗부분이 앞으로 15도 가량 기울어 있다. 그림을 새긴 면에 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깎은 듯하다. 

바위면에는 상하 2단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내용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상단에는 기하학 무늬와 인물상, 동물상이 그려져 있다. 기하학 무늬는 마름모, 원, 우렁, 물결, 가자무늬등 다양하다. 사슴, 호랑이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동물들이 보인다. 암수동물 두마리가 마주 보면서 서있는 특이한 모습도 눈에 띈다. 

하단에는 신라시대 선각그림과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이곳을 찾았던 신라인들이 기념으로 적은 글과 행렬도 들이다. 새와 용의 모양도 나타나 있다. 

새김기법은 대상물 전체를 음각한 면쪼으기, 윤곽선을 깊게 판 선쪼으기, 가늘게 드러낸 가는선 긋기 등 여러가지 기법이 동원됐다. 동물과 사람은 대부분 면쪼으기, 기하무늬류는 선쪼으기, 기마행렬과 배 상상 속의 동물 등은 가는선 긋기로 표현했다. 일종의 표현주의적 암각기법이다. 

특히 상단은 쪼으기기법, 하단은 가는 선각과 긋기기법을 보여 제작연대를 구분짓는 단서가 된다. 이 바위조각은 농경생활과 풍요 등을 종교적 의미로 상징화한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각석의 중하부에는 300여자의 명문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책자모양 안의 원명과 그 왼편의 추명으로 구성돼 있다. 원명은 신라 법흥왕 12년(525년)에 새겨졌다. 진흥왕 부친인 입종갈문왕이 '서석골'이라 부르는 이곳에 들른 것을 기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추명은 법흥왕 26년(539년)에 새겨진 것이다. 

이밖에 명문에는 화랑들의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어 화랑들이 이곳을 도량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한다. 어쨌든 6세기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꾸준하게 이어진다. 학술기관의 귀중한 고증자료이자 문화유산답사의 필수코스이며 학생들의 좋은 현장학습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쉬운 만큼 훼손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무분별한 탁본과 몰지각한 낙서가 훼손의 주범이다. 울산시는 1997년 2월 2천900만원의 예산으로 각석 주위로 높이 2.5m, 길이 34.1m 의 보호철책을 설치했다.

<<주변관광지>>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 전 전기 백악기시대에 살았던 중대형 공룡들의 것으로 귀중한 자연사 자료이다. 당시의 공룡들은 아열대 기후 아래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고, 열대 무역풍이 영향을 미치는 사바나 지역의 하천평야 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750m² 면적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 남아 있는 것은 대형 초식공룡인 한외룡(울트라사우루스)을 비롯한 용각룡 열마리의 발자국과,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고성고사우루스) 한 마리의 발자국 등 200여 개이다. 걸어간 발자국 길은 보이나 그 발자국들이 평행한 행렬은 아닌 것으로 보아, 공룡들은 이 일대를 평화롭게 배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룡발자국 화석이 나온 지층은 중회색이암 혼휄스의 비 저색층으로 경상누층군 하양층군 사연리층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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